김진문(시인/논설위원) 

 

울진의 봄 날씨는 꽤나 변덕스럽다. 대체로 3월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때로는 진갈눈까지 내리고 기온조차 새초롬하다

다행히 씨감자를 놓는 날, 봄볕은 따사로웠다. 이제 20여 일쯤 지나면 감자는 세상 밖으로 연초록 잎을 피워 올릴게다. 감자는 다른 작물보다 밑거름이 많이 필요하고, 감자 꽃이 필 무렵에는 물을 넉넉히 대야만 굵은 감자를 거둘 수 있다고 한다.

작년에는 봄 가뭄에 물을 제때 대어 주지 않아 씨알이 그리 굵지 않았다. 작년 경험을 살려 올해는 밑거름을 많이 깔고, 물도 제때에 넉넉하게 대어 씨알 굵은 감자 캐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감자는 동서를 막론하고 구황작물이었다. 고흐의 걸작 『감자먹는 사람』이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도 식량이 모자랐던 보리 고개 시절, 농촌의 여름철 주식이었고, 썩은 감자에서 나오는 녹말가루로는 별미인 감자떡을 해먹기도 했다. 한 가지 음식을 오래도록 많이 먹으면 지겹고 물린다고 한다. 하지만 감자는 예외인 것 같다. 어린 시절에도 많이 먹었지만 여전히 나는 지금도 감자를 잘 먹는다.

작년, 오랜만에 감자 꽃을 자세히 보았다. 평소에는 무심코 보던 감자 꽃이지만, 어느 문학 모임에서 권태응의 감자 꽃<동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자주 꽃핀 건 자주 감자/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하얀 꽃핀 건 하얀 감자/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 <감자꽃> 전문』

평론가들은 이 동시는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에 대한 민족저항 의식이 담긴 시라고 말한다. 조선인은 하얀 감자인데, 『창씨개명』하여 자주감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아래서 민족혼을 불러 세우고 싶었던 권태응의 항일정신이 녹아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일본인은 일본인이고, 조선민족은 조선인이라는 것.

모임이 있던 날 작품 주제보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정말로 자주 감자 꽃에는 자주색의 감자가 달리고, 하얀 감자 꽃에는 하얀 감자가 달리는지에 관한 과학적 근거였다. 어느 분 말에 따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관념을 깨는 것이어서 유전자가 어쩌고, 돌연변이거나, 실제 확인해봐야겠느니 각자 의견이 분분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동한 필자는 작년에 하얀 꽃 감자를 놓아 보았다. 그리고는 나중에 서너 포기를 캤더니 모두 하얀 감자였다. 7월경 다 자란 감자를 캤을 때도 모두 하얀 감자였다. 요즈음은 여러 기능성 감자가 나와 그건 또 어떨지 모르겠다. 고구마 같은 감자도 꽃 색깔과 같을지?

『강원도 감자바위』라는 말이 있다. 감자와 바위, 부드러운 감자와 굳고 딱딱한 돌덩어리, 비유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비유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순박하고 너그럽지만 때로는 견고한 의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불변의 속성을 지닌 끈기와 바위 같은 믿음과 사랑 등을 표현할 때 상징의 비유가 곧 바위다.

이를 사람에게 비유하면 순박하고, 부드러운, 때로는 강한 의지를 지닌 인격의 소유자임을 뜻한다. 감자는 작물 중에서 썩어도 버릴 것 없는 유일한 작물이 아닐까 한다. 감자는 썩어서도 남을 돕는, 남을 이롭게 하는 희생정신을 지닌 작물이다. 배고픈 자에게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는 『평화로운 먹이감』이자, 땅 속의 사과라고 할 만큼 성인병 예방에도 좋은 인류의 식량작물이다. 그런 점에서 위대한 『문화 식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감자는 평화』라고 규정하고 싶다.

전세계가 주목한 가운데 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올림픽을 계기로 이제 한반도에도 남북 화해의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림픽 개회 전 대회 성공을 다짐하고 관계자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이 『개마고원 감자와 강원도 감자가 만나는 한민족 대축제의 장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000년부터 남한이 지원한 감자씨 생산 농장이 있는데, 이를 의식한 발언 같다.

누구든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한다. 『감자와 평화』 『감자바위』와 같은 정신으로 남북이 나아간다면, 개마고원의 감자가 남한에서도 꽃 피울 날이 오겠지. 그 꽃은 아마도 감자꽃, 통일 감자 꽃이 될 것이다. 이제 한반도에도 전쟁과 대결이 아닌 비핵화로 나아가고, 남북 화해와 평화가 서서히 깃들어 감자바위처럼 굳건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